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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관우 나이 본명 키 프로필 피습 늪 아버지 조통달 이혼

by 통통이0206 2024. 8. 10.

조관우 나이 본명 키 프로필 피습 늪 아버지 조통달 이혼

조관우 나이 본명 키 프로필 피습 늪 아버지 조통달 이혼

늪, 꽃밭에서 등 가성의 달인 조관우가 가보자고에 나와 예전에 술 먹다 피습당한 썰을 풀었네요.

알고 보면 엄청난 음반 히트 메이커였던 조관우.

오늘은 조관우 나이 본명 키 프로필 피습 늪 아버지 조통달 이혼 등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조관우 나이 본명 키 프로필 피습 늪 아버지 조통달 이혼

조관우 가보자go 피습 사건 2번의 이혼

조관우는 '가보자GO' 시즌2에서 지인과 술을 먹다가 소주병에 목을 찔렸던 아찔한 순간을 회상했습니다.

조관우 피습 사건

 

"당시 두 아들을 키우면서 미안한 부분이 많았다. '죽고 싶다'는 말을 자주 했다. 그날도 지인과 함께 술을 마시고 걷다가 '괴롭다. 이렇게 살면 뭐 하나. 그냥 죽고 싶다'라고 했는데, 갑자기 '그럼 형 죽으세요'라며 소주병으로 내 목을 찔렀다"네요.

목에서 피가 철철

 

 MC 안정환과 홍현희는 "그 사람이 누구냐"라고 물었고, 조관우는 "팬이다"라고.

 

"사고 후 지인 역시 놀라 '자신이 미쳤나보다'면서 119를 불렀다고 합니다. 다행히 동맥을 건드리지 않았지만, 유리 파편으로 인해 수술 시간이 조금 길었다"라고 설명했습니다.

 

안정환은 "팬이 너무 좋아하니까 (현실에)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고 충동적으로 그랬나 보다"라고 추측했죠.

 

조관우는 "정신이 들고 경찰서에서 연락 왔는데, 그 친구는 잘못 없으니 '풀어달라'라고 했다"라고 덧붙였습니다.

 

조관우는 덤덤하게 얘기했지만 사건이 알려진 당시에는 모두가 충격에 빠졌었죠. 2012년 7월, 당시 가해자 A 씨는 조관우와 4년 전에 가수와 팬으로 만난 지인이었다고 합니다.

 

경찰에 따르면 A씨는 조관우 측과 친분이 쌓인 후 2011년 9월부터 12월까지 조관우의 지방 공연 등의 스케줄에서 운전 등의 일을 잠깐 돕기도 했다고 합니다.

 

조관우는 A씨와 1차적으로 술자리를 가진 후 2차 술자리를 갖기 위해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식사동에 위치한 자신의 자택으로 이동하던 중 봉변을 당했는 대 A 씨는 조관우의 자택으로 들어가던 중 지하주차장 통로에서 소주병을 깨고 조관우의 목을 찌르는 사건을 저질렀습니다.

 

A 씨는 경찰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많이 취한 상태였지만, 말다툼도 없었고 전혀 안 좋은 분위기가 아니었다. 나도 왜 그랬는지 정말 모르겠다. 귀신에 쓰인 것만 같다. 당시 상황이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라고 대답한 걸로 알려졌습니다.

 

130바늘이나 꿰맸지만 조관우는 A 씨를 용서했고 당시 관계자는 “다행히 치명적인 부상은 피해 생명에는 지장이 없으며 회복 후 노래를 부르는 것에도 큰 이상이 없을 것이라고 진단받았다고 합니다.

다행인 거죠.

 

조관우는 데뷔 당시 소위 ‘얼굴 없는 가수’로 앨범에 얼굴을 싣지 않았으며 방송 출연도 거의 하지 않았음에도 4번 연속 100만 장 이상의 앨범 판매를 달성했지만, 그의 결혼은 두 번 모두 꺾어지고 말았습니다.

 

 

그의 첫 번째 결혼은 1993년 작사가 겸 보컬 디렉터 장연우와의 결혼으로 음반 작업을 함께 하는 등 업계에서 소문난 잉꼬부부로 슬하에 두 아들을 두었으나 2003년 성격 차이를 이유로 합의이혼을 했습니다.

첫번째 아내

 

장연우는 후에 이혼 사유에 대해 “차츰 삶을 바라보는 서로의 가치관이 너무 다르다는 걸 알게 됐다. 그 간격을 메우기가 어려웠다”라고 설명했으며 두 사람은 이혼 후에도 친구처럼 지내며 2005년 조관우가 발매한 EP 앨범 “가을의 기적”을 함께 작업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조관우는 이혼 7년 만에 10살 연하의 아내와 두 번째 결혼에 성공해 함께 봉사활동을 다니는 등 행복한 결혼생활을 이어 나갔죠.

2번째 아내

 

그러나 오랜만에 찾아온 행복도 잠시 조관우에게는 또 다른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그는 “경제적 위기감을 아파트에 이사 가서 느꼈다. 아파트를 구할 수 없는데 우리가 들어간 거다” 당시를 회상했습니다. 그는 “9억 정도 하는 아파트를 샀는데 반은 은행 돈을 빌렸다. 그런데 9억 아파트가 4억으로 떨어졌다. 집 2채가 경매로 넘어갔다. 헤어지게 된 건 경제적인 위기가 와서였다”라고 두 번째 이혼 사유를 말했습니다.

2번째 이혼 이유

 

2011년 성대 결절 수술 이후 수입 없이 수개월을 힘들게 지내던 조관우는 지인에게 배신당해 15억 가량의 빚을 지고 신용불량자가 되며 가지고 있는 아파트 2 채도 경매로 넘기고 결국 재혼으로 이룬 가정마저 깨지게 된 거죠.

 

조관우는 한 방송을 통해 “사람을 너무 믿었다”라며 “주소지도 없이 떠돌고 있지만 아이들에게 빚을 남기는 아빠가 되고 싶지는 않다”라고 고백한 적이 있습니다.

 

두 번의 결혼을 통해 3남 1녀의 자식을 거두게 된 조관우는 어려워진 형편과 코로나로 인한 악재가 겹치며 학비와 양육비를 제대로 대주지 못하는 가슴 아픈 경험을 겪었다고 하네요.

큰아들과

 

경제적 문제로 큰 어려움을 겪을 당시 그는 외출도 하지 않고 수면제 도움 없이 잠을 이루지 못했으며 스스로 생을 마감하려고 생각하기도 했다고.

 

 

그런 그에게 가장 힘이 돼준 이들 역시 그의 자녀들이었다며 미안함과 고마움을 전했습니다.

아이들과

 

조관우 나이 본명 키 프로필 아버지 조통달 

조관우 본명은 조광호입니다.

조관우 과거 사진

 

나이는 1965년 8월 3일생 59세.

 

키는 172cm, 69kg, 혈액형은 A형 가족은 아들 조휘, 조율, 조환, 딸 조하은이 있습니다.

 

아버지 조통달, 이모할머니 박초월, 누나 2명이 있는데 아버지 조통달, 이모할머니 박초월 모두 유명한 국악인입니다.

 

학교는 국악예술학교를 나와 캘리포니아 주립대학교 시스템 미술학과를 중퇴했습니다.

 

1994년 1집 앨범로 데뷔 조관우는 1965년 전라남도 광산군에서 판소리의 대가인 조통달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조통달

 

조통달의 집안은 예로부터 국악만을 해온 집안으로 조통달의 이모인 박초월 역시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명창이죠.

이모 할머니 박초월

 

집안의 영향인지 조관우 역시도 어렸을 적부터 판소리, 창 그리고 가야금에 재주를 보여 국악예술고등학교에 진학해 가야금을 전공했습니다.

 

이에 대한 에피소드가 있는데, 중학교 시절 공부를 못해서 고등학교 진학을 장담하지 못하던 찰나 아버지가 갑자기 가야금을 가르쳐줘 국악고에 진학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근데 이 국악고라는 곳이 대한민국의 수많은 예술고등학교들 중에서 지금까지도 서울예고, 선화예고과 각축전을 벌이는 명문고이고, 조관우는 그런 학교를 가야금의 3년 치 커리큘럼을 1주일 만에 다 배워서 합격했다는 것이죠.

 

엄청난 재능이 있었던 것이죠.

그런데 가야금을 하나도 모르다가 1주일만 배운 건 아닐 테고 원래 할 줄 알았는데 시험공부를 1주일 시켰다는 거겠죠. 아니면 말이 안 됨.

 

그러나 아버지 조통달은 막상 본인이 가르쳐줘 놓고선 1등만 알아주는 예술계의 분위기 때문에 아들이 계속 가야금을 전공하는 것을 막았고, 결국 조관우는 가야금을 포기하게 됩니다.

 

그래도 재능이 어디 가진 않았는지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연주를 잘한다고 하네요.

 

 

 

고등학교 시절부터 외국 음악을 접해 왔으며 국악을 그만둔 이후 완전히 미국 디스코/펑크 밴드들의 음악에 빠지게 됩니다.

 

특히 이 시기에 비지스와 같은 가성 창법을 이용하는 록밴드나 Earth, Wind & Fire 등 가성을 사용하는 흑인 음악을 접하게 되었고 여기에 감명받은 조관우는 자신만의 가성 창법을 만들어내게 되고 이것이 이후 조관우의 특징이 되죠.

노래하는 조관우

 

데뷔 초 얼굴 없는 가수로 콘셉트를 잡고 활동했는데 소속사의 전략이었다고 합니다. 자칭 눈 감고 듣는 가수. 외모와 목소리의 갭이 커서 항상 장발을 고수하고 선이 굵은 편이라 다소 느끼한 이미지를 갖고 있어서 그런 것 같다네요.

 

얼굴 없는 가수 콘셉트는 데뷔 초기 때만 그런 것이고 이후 음악 방송이나 콘서트를 활발하게 했습니다.

 

다마 유흥업소 출연을 하지 않고 MR을 사용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죠.

프로필 사진

 

1집은 발매 후 130만 장 가량의 판매고를 올리는 대히트 쳤는데 음반이 불티나게 팔려나가자 TV 출연을 해달라는 방송국과 소속사의 요청에 결국 수락했고 단 한 번 출연한 방송 직후 음반 판매량이 급락했다고 합니다.

 

1995년 2집 리메이크 앨범인 "Memory"를 발표하게 되는데 이 앨범은 비공식 추산 320만 장, 공식 214만 장 가량의 판매고를 올리는 등 공식적으로는 3번째, 비공식적으로는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리는 기록을 세우며 1집 이상의 엄청난 히트를 기록했죠.

 

리메이크곡 "꽃밭에서"는 "늪"과 함께 조관우를 대표하는 곡으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또한 2집에 수록된 오리지널 곡 "겨울이야기"는 CF 음악으로 삽입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1, 2집이 연속으로 대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제작사와의 불리한 계약으로 인해, 조관우 본인은 지하 전세방에 살며 막걸리로 끼니를 때우는 등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렸다고 하네요.

 

이런 상황은 1996년 3집 "My 3rd Story About"을 발매하고 소속사를 옮긴 후에야 개선될 수 있었다고. 조관우의 전성기 가성이 6옥타브, 7옥타브라는 음역에 도달했다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사실이 아니고 4옥타브 도가 최고라고.

제작발표회

조관우가 호평을 받은 것은 단순히 가성으로 노래해서가 아니라 가성을 아름답게 내고 유지할 수 있으며 진성과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카운터 테너와는 또 다른 특색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나가수 출연

 

또한 그는 트로트창법이 섞인 음악을 해왔기에 강한 비브라토와 꺾기 등까지 사용하였으니 더더욱 성대에 무리가 갈 수밖에 없는데 이것을 극복하고 자신만의 창법으로 50이 넘은 나이까지 목소리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것이죠.

 

이후 연기활동도 하여 시트콤 청담동 살아요, 닥치고 패밀리, 영화 조선 명탐정, 그것만이 내 세상 등 드라마와 영화에 많이 출연해 나쁘지 않은 평을 받았습니다.

 

밀리언 셀러 앨범을 4개나 가지고 있으면서 잘 풀리지 않았던 조관우.

하지만 아직도 팬층이 확고한 조관우.

 

조관우의 가장 큰 재산은 아이들인 거 같습니다. 3남 1녀 아이들을 위해서 앞으로 또 한 번 전성기를 누리시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조관우 파이팅~!!